언제까지 품 안에 자식일까?

탐스런 목련이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양재천 가로수 벚꽃도 개화를 준비하는 모습이 바빠보인다. 햇빛이 많이 드는 가지에 꽃이 아무래도 먼저 얼굴울 내밀고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활짝 피는 그 시기는 양쪽이 만개하는 모습에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 

모든 것이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때가 되면 제자리를 찾아 간다. 기다리는 시간에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면 알아서 늦지않게 자리 잡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얼마 전에 '서른 아홉'이라는 드라마를 보며 딸 아이와 서로 먼저 가지 말고 남지 않게 하자고 이불 위에서 씨름을 했다.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에 부모와 자식, 선배와 후배, 동기간이라는 순서는 지킬 수 없는 것을 확인했다. 이별은 슬프지만 막을 수 없는 자연의 순리가 아닐까?

'품 안에 자식'이라는 말은 듣기에 따라, 말 하는 사람의 뉘앙스에 따라 호감과 비호감을 느낀다. 100세가 지난 부모의 마음에 노인이 된 자식은 아직도 돌봐야 하는 자식이지 않은가. 우리가 부모님 두 분이 돌아가시고 홀로 남는 그 시간에 품 안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그 시간에 다시 안겨있는 나의 자식 덕분에 벗어난 품에 대한 그리움은 덜하다. 

부모의 품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지는 다양한 모습을 본다. 하지만 아직도 안타깝게 근대적인 마인드를 보여주며 역행하는 부모님을 만나기도 한다. 부모의 기준에 닿아야만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확신하는 따뜻함이 과하신 품을 갖고 계시는 부모님이 종종 보인다. 반면에 뜨겁지는 않지만 춥지 않고 식지 않는 온도로 허전한 마음을 느끼지 않게 하는 부모님도 있다.

태중에도 태아의 기호를 알 수 있다고 한다. 태교란 것을 하지 않는가. 하물며 세상에 나온 아가라도 부모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일부이다. 품안 에 있는 자식이라도 부모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니 아이의 어떤 것도 단정짓지 말고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마음 가짐을 잃지 않아야 한다. 부모와 자식도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기본적인 관계에서 시작을 해야한다. 

'품 안에 자식'은 내 마음대로 결정짓고 감정까지 뒤흔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도 자식에 전전긍긍하며 휘둘리며 감정을 소비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것의 우선이 자식으로 희생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다. 부족한 것에 자책하거나 미안함에 안스러워 하지 말고 서로 마주 보는 연습을 시작해야 한다. 자식을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할 때 서로의 품을 내 줄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서로 책임 질 수 없다. 마주보는 품을 넓히고 뜨겁지 않지만 온기가 식지 않게 언제든 안아 줄 수 있는 두 팔을 벌리면 된다. 부모가 모든 것을 안고 무거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먹고 사는 것에 준비를 부모가 해 주려고 하지 않기로 하자.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가게 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며 도전하게 하는 것에 힘을 실어주기로 하자. 품 안에 자식이 춥지않게 마음의 온도를 떨어뜨리지 않고 기다려 주자.

우리도 부모의 품 안에 자식임을 잊지 말고, 지나치게 강요하지 말자. 벚꽃이 만개하면 중간고사라는 우스개 소리로 아이들에게 꽃을 볼 수 있는 시간을 뺏지는 말자. 함께 파란 하늘을 수 놓는 꽃송이를 보며 봄날을 누려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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